보르헤스 작품에 나타난 꿈의 의미 - 김소원
- 인식론적․존재론적 접근 -
꿈 속에서는 모든 몽상의 거품인 세상의 덧없음을 꿈꿀 수 있다
(꿈은 거품이다 Träume sind Schäume) - 블라스 마타모르
보르헤스 사상은 “감각의 인상 이면에 객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버클리와, “변화의 인지 이면에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흄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누구도 과거에 살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미래에 살지 않을 것이다. 현재만이 유일한 삶의 형상이며, 현재야말로 당신의 소유물로서 그 어떤 악도 당신으로부터 현재를 빼앗아갈 수 없다”고 한 쇼펜하우어에 도달하게 된다. 보르헤스는 이 세 명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출발점으로 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이론을 확립시켜나간다.
플라톤 이후 서구의 형이상학을 가늠하는 이성 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보르헤스의 반명제는, 언어와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것 사이의 관계는 임의적이므로 언어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곧 언어로만 성립될 수 있는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이지 않으며 하나의 자의적 가설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본질로부터 현상을, 신으로부터 인간을, 존재로부터 실존을 떼어놓는 형이상학적 흐름 속에서, 실존주의자들은 본질과 신을 자의적 가설로 치부하고 거부하는 데에 따른 공백을 현상적 실체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통해 보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세계의 실체에 대해 회의를 보인다. 그에게 있어 현상을 규정해 주던 잣대가 사라지면 우리가 실존이라고 믿는 현상 또한 무규정인 어떤 것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마치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무엇과 같다. 세계의 이러한 성격은 인간이 자신의 생명 이전과 이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인식에서, 보다 극적인 형태로 은유된다. 그럼으로써 자기 정체성 추구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영원히 순환하는 <의문의 회구>로서의 존재론적 탐구 속에서 인간은 가설이나마 자신의 의미 체계에 대해 규정을 내리려고 한다. 그리고 보르헤스에게 비치는 그러한 가설로서의 의미 체계는, 끝없이 의미를 확대, 재생산해 나가는 <열린 구조>를 가진 그의 단편소설 속에서 미로, 꿈, 거울이라는 이미지들이 형이상학적 상징으로 사용됨으로써 나타난다. 그리고 그중 가장 중심적인 가설로서의 의미 체계는 <꿈>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광의적으로는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며 인식론적 혼돈을 보이는 환상세계인 <꿈>과 협의적으로는 개인적인 존재론적 탐구를 모색하고 있는 세계로서의 <꿈>을 살펴봄으로써 보르헤스 작품에서 <꿈>이라는 의미 체계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1.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환상세계로서의 꿈
보르헤스 작품 속에 나타나는 <꿈>의 세계는 항상 다양한 시간이라는 문제와 맞물려서 생각되어진다. 작품 속에서 시간은, 시간의 전후가 인과적 고리에 의해 선형화 된다는 상식을 거부한다. 초법칙적인 것으로 인지의 한계 밖에 있는, 복합적이고 다선적이며 가역적이고 비역사적이며 상대적인 시간이다. 근대 소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시공간이 인식론적 근거를 획득하면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보르헤스의 문학은 바로 이러한 근대 소설 미학의 반명제이다. 그에 의하면, 사실주의 소설은 “우리들로 하여금 언어로 만든 인공물이라는 성격을 잊게 만들며, 갖가지 쓸모 없는 정확성을 기함으로써 새로운 개연성의 색채를 덧입힌다”. 즉 사실주의로 대변되는 근대 소설은 역사적․객관적 현실의 재현이라는 명제를 추구함으로써 이야기 문학의 본성인 허구성을 감추고 있는 가짜 사실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그 무엇은 실제로는 환영이며, 진실은 저 너머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현실 세계와 비현실적인 상상의 세계의 불확정한 경계선상에 위치하는 <꿈>이라는 의미 체계를 통해,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고 있다는 것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꿈>의 의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는데, 여기서 보르헤스는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 즉 환상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 <원형의 폐허> :
꿈을 꾸어 자식을 만드는 한 도인이 등장한다. 그 아이는 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불에 타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그를 만들었던 도인이 기거하던 원형의 신전에 불이 나고 그 또한 자신의 아들처럼 불에 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마치 자신도 아들처럼 어느 누군가의 꿈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결국 죽음이 존재함으로써 모든 것은 실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꿈에 불과하다.
보르헤스는 여기서 인식의 주체가 결코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객체적 질서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한계 상황을 그리고 있다. 즉 인간은 우리의 경험적 현실 인식에 도취되어 우리 자신이 꿈꾸고 지어낸 비현실 세계(꿈)를 상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을 꿈에 비유하여 “현실은 곧 꿈”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고정된 등식으로 단순히 규범화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경험적 세계가 꿈이라면, 경험적 세계를 부인하는 꿈 자체는 꿈이 아닌 진정한 현실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꿈에서 현실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꿈의 환상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즉 “(현실=꿈)=꿈”의 순환적 연쇄 등식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옥시모론적 환상세계인 <꿈>은 무시간성 속에서, 즉 현재만이 존재하는 시간 속에서 영원한 순환을 꾀한다. 경험적 현실(꿈) 속에서 우리의 경험적 자아(도인)도 그 일부(다른 이의 꿈의 일부․아들)를 구성하는 것이며 결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경험적 인식 논리와 사유 방식에 대한 허무적 성찰이 보인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잠을 자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추구하고 있는 목표는 물론 초자연적이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 인간을 꿈꾸고 싶었다. 그는 세심한 완벽함을 가지고 그를 꿈꿔 현실 속에 내놓고 싶었다”
“묵묵한 학생들의 무리가 원형경기장의 계단식 좌석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지막에 있는 학생들의 얼굴은 수세기 너머 우주의 저 끝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또렷하고 정확했다”
“그는 단 한 학생만 남겨두고 그 거대한 환영의 학교를 영원히 지워버렸다”
“꿈의 뒤엉키고 변덕스러운 질료를 가지고 어떤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남자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모래로 밧줄을 만들거나 얼굴 없는 바람으로 동전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를 잘못 인도한 그 거대한 환각을 송두리째 잊고 다른 작업 방식을 찾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 자정에 두 명의 뱃사공이 그의 잠을 깨웠다.(...) 그들은 그에게 <북쪽 신전>에서 살고 있는 불 속을 걸어가도 타지 않은 한 도인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문득 신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 중 단지 <불>만이 자신의 아들이 환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의 꿈에 만들어진 존재라는, 얼마나 형용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낄 것인가, 얼마나 아찔한 현기증을 느낄 것인가!”
“폐허가 된 <불의 신>의 신전이 불에 의해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새들이 없는 새벽에 도인은 벽들을 집어 삼키며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길들을 보았다. 순간, 그는 강으로 뛰어들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죽음이 자신의 노년을 영화롭게 만들어주기 위해, 자신을 힘든 삶의 노고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불길의 날개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불길은 그의 살갗 속을 파고들지 못했다. 불길은 그를 할퀴고, 그를 집어삼켰지만 그는 불의 열기를 느끼지도 못했고, 타지도 않았다. 안도감과 함께, 치욕감과 함께, 두려움과 함께 그는 자신 또한 자신의 아들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 꿈꾸어진 하나의 환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코울리지의 꿈> :
역사적(상상적) 사건으로서 현실에 대한 표현은 꿈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는 현실과 구분된다. 꿈속에서 이미지들은 우리가 그것들이 나타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어떤 느낌들을 대변한다. 우리는 꿈속에서 스핑크스가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스핑크스의 꿈을 꾸는 것이다. <꿈>이라는 이미지는 한편으로 <거울>이라는 이미지와 흡사한 의미 체계를 지니는데, <거울>이 무한 복제 속성을 지닌 것처럼 <꿈> 또한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가운데 무한히 확장된다.
“<쿠빌라이 칸>을 배태한 꿈의 경이로움을 한없이 확대시키는 궁극적인 하나의 사실이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코울리지의 꿈 이야기는 코울리지 이기보다는 수많은 세기를 앞선 것이요,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어느 몽골 황제가 13세기에 한 궁궐을 꿈꾸고 그는 꿈에 나타난 대로 궁전을 짓는다. 18세기에는 이 건축이 꿈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리 없었던 어느 영국 시인이 그 궁궐에 대한 한편의 시를 꿈에 본다. 잠든 인간의 영혼들 사이에 역사(役事)하며 대륙과 세기를 포괄하는 이 대칭성에 비한다면, 성전에서의 승천, 부활과 현화(現化)란 아무것도 아니거나 아주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성적인 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예컨대, 궁궐이 파괴되자 황제의 영혼이 코울리지의 영혼에 스며들어, 그로 하여금 대리석과 금속보다 훨씬 더 영속적인 언어로 궁궐을 다시 짓게 하였으리라고 가정할 수 있다. 첫 번째 꿈은 현실에 궁궐을 부가하였고, 5세기 뒤의 두 번째 꿈은 궁궐에 의해 암시된 시를 현실에 부가하였다. 꿈의 유사성은 한가지 계획을 엿보게 한다. 그 엄청난 기간이 초인간적 존재의 역사(役事)임을 드러낸다”
“만일 구도가 벗어나지 않는다면, 수 세기쯤 지난 어느 밤에, 누군가가 똑같은 꿈을 꿀 것이요, 다른 사람들이 그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자신의 꿈에도 대리석이나 음악의 형식을 부여할 것이다. 아마도 꿈의 연쇄 과정은 끝이 없을 것이며, 아마도 열쇠는 그 마지막 꿈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인간에게 아직도 계시되지 않은 원형, 영원한 물체(화이트헤드의 명명법에 따르자면)가 세계에 점진적으로 침투해오지 안을까. 그 첫 실현은 궁궐이요, 그 두 번째 실현은 시였다. 누군가 그 둘을 비교해 봤더라면,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 <기다림>
한 남자가 독자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에서 자신을 죽이러 오게 될 한 남자를 기다린다. 그러나 마지막 죽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함으로써 그러한 일차적인 의미 구조를 또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꿈> 속에서 현실을 비현실화 시키고자 한다.
“방의 어슴푸레 속에 우뚝 멈춰 서 있고, 어슴푸레에 의해 기이할 만큼 단순화되어 있고(공포의 꿈 속에서 그들은 항상 선명했었다), 경계 태세도 미동도 없이, 그리고 끈기있게, 마치 들고 있는 무기의 무게가 몸을 짓누르기나 하는 것처럼 눈을 내리깐 채 마침내 알레한드로 비야리와 낯선 남자 하나가 그에게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는 기다리라는 시늉을 했고, 마치 다시 잠을 청하려고나 하는 것처럼 벽 쪽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 <거북이의 화신들> :
쇼펜하우어는 그의 작품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인간의 인식의 대상으로서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적인 세계는 시간․공간․카테고리(category), 특히 인과율(因果律)이라는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의 형식으로 구성된 표상일 뿐, 그것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계 전체는 <나의 표상(表象)>이며 세계의 존재는 주관에 의존한다. 그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 시대의 변천 등 인간의 다양한 형태는 의지의 적절한 객체성(客體性)인 이데아를 간파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어서 그 자체에서는 어떻게 되어도 좋은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또 다른 창조물로서, 환상적으로 건설된 세계인 <꿈>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며 <의지>의 행위를 묘사하는 매개체로 <꿈>이라는 은유를 사용한다.
인간은 예정조화에 의해 각각 형이상학적 명상에 따라 그에게 적합한 <꿈>을 꾼다. 그리고 삶의 모든 <꿈>은 매우 예술적으로 그와 일치하는 것을 하는 각각으로 동여매진 것과 동시에 그 외 필요한 것들을 부여하는 사이에서 만난다.
이처럼 주관에 의지하는, 자의적이고 추측적인 현실 세계의 존재 방식은 환상적 특성을 지닌 허구(비현실) 세계인데, 우리는 이것을 <꿈>이라는 의미 체계를 통해 파악할 수 있으다. 또한 삶의 형상은 끝없는 현재이고, 동시에 개인은 이데아의 모상들로서 시간 속에서 분출되고 사라지는데, 이는 덧없는 <꿈>에 비견된다. 이러한 생각은 다음 구절을 통해 보르헤스 작품 속에서 표출된다.
“낱말의 배열(철학도 이에 다르지 않다)로 우주와 아주 흡사해질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무모하다. 이 저명한 배열 중에서 어느 것은 - 극소하게나마 - 다른 것들보다 좀 더 근사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역시 무모하다.나는 어느 정도 신뢰를 얻고 있는 몇 가지를 검토해 보았다. 오로지 쇼펜하우어가 시도한 해명에서만이 우주의 어느 일면을 인지하였노라고 감히 확신한다. 그의 학설에 의하면, 세계는 의지의 공장이다. 예술은 - 항상 - 가시적 비현실을 필요로 한다. 하나만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드라마의 대화자들의 은유적이거나 혹은 운율이 있거나 혹은 용의주도하게 우연적인 어법... 모든 관념론자들이 인정하는 바를 인정하자. 세계의 환각적 특성을. 어떤 관념론자도 시도하지 못한 것, 즉 그 환상적 특성을 확인해주는 비현실을 찾아보자.(...) <최대의 마술사란 자신의 마술적 환각들까지도 자율적 출현으로 착각할 정도로 스스로조차 마술에 빠지는 자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경우가 아닐까?> 나는 그러리라고 믿는다. 우리들은 세계를 꿈꾸었다. 드러내기 싫어하는, 신비스러운, 가시적인, 공간의 도처에 편재하며 시간에 철두철미한 세계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 건축물에서 그 세계가 허구임을 깨닫게 해주는 가느다랗고 영원한 불합리의 간극들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시 <거울> : 거울과 꿈은 비현실적 세계를 의미하는 이미지
“기묘한 일이지.
꿈이 존재하고 거울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투적이고 마모한 일상에 상(像들)이 획책한
심오한 환영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나는 생각하였네)
신은 거울 면의 매끈함으로 빛을,
꿈으로는 어둠을 만드는
온통 불가사의한 건축술에 골몰한다고“
2. 정체성 추구세계로서의 꿈
보르헤스의 <꿈>은 동일한 것을 동일하지 않게, 동일하지 않은 것을 동일하게 만드는 세계로,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고 상극적인 것조차 가능하고 예술적인 것으로 만드는 그의 선형적 인과관계를 넘어선 시간의 개념이 표출된다. 주인공과 화자를 독립적 개체이면서 동일 인격체로 이끄는 <꿈>의 세계는 무시간성 속에서 성립되며 무한히 확장한다. 관념주의자 교리에 의하면, <살다>와 <꿈꾸다>라는 동사는 동의어이다. 즉,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꿈>을 꾼다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은 그 체계의 무한한 재생산 과정이다. 이렇듯 무한 복제의 의미로서 <꿈>은 <거울>의 이미지와 상통하며, 무한 우주의 의미로서 <꿈>은 <미로>와 상통한다. 보르헤스의 <꿈>의 세계는 ‘나’를 찾아 떠나는 무한한 정체성 추구 공간이다. 보르헤스는 ‘내’가 도처에 있으며 어디에도 없는 세계를 헤매고 있는데, 이 세계는 공간적인 세계가 아니라 시간적인 세계이다. ‘나’는 역사적 시점에서 ‘나’로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 어느 역사적 시점에도 일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나’인 것이다.
<꿈>은 또 다른 ‘나’에 대한 ‘나’의 거울 보기이다.
- <보르헤스와 나> :
<꿈>이라는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존재에 대한 질의를 던지며 존재론적으로 위기에 닥친 정체성의 의미를 되집어보게 하는 작품이다. 종(種)으로 대변되는 개별적 인간들. 보르헤스가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것은 인물이나 사건 배경이 시간축의 변용에서 역동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다른 사람, 그러니까 보르헤스라고 하는 어떤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그가 몇 페이지의 좋은 글을 썼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글들이 나를 구원해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좋은 것은 이미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그의 것도 아니고, 단지 언어 또는 전통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명백하게 소멸할 운명을 가지고 있고, 단지 내 자신의 어떤 순간들만이 남의 기억 속에 남게 될 것이잖는가”
“나의 삶은 덧없는 것이 되고, 나는 모든 것을 잃고, 그리고 모든 것은 망각 또는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우리 둘 중에서 누가 이 글을 쓰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 <타자> :
보르헤스와 보르헤스의 또 다른 분신은 그가 지녔던 자아에 대한 강박관념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청년 보르헤스와 노인 보르헤스의 만남은 시간에 의해 변형된 동일한 인물의 두 상이한 측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은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오래된 주제 <이중 인격>을 다루고 있다. 영국에서 그것의 이름은 <물신(物神)>, 더 문화적으로 말하면 <살아 있는 것의 정령>이다. 독일에서는 도플갱어(동일인이면서 동시에 다른 장소에 나타나는 사람)라고 부른다. 이것은 <제2의 자아 alter ego>이다. 이러한 영적 환영은 거울, 물에 비친 모습, 또는 단순히 한 사람을 관찰자임과 동시에 행위자로 만드는 기억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화자들이 두 사람이 되기 위해 아주 다르면서도, 하나가 되기 위해 충분할 만큼 비슷하도록 만드는 일이 보르헤스의 작업이다.
“<당신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로군요. 나 또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구요. 우리는 1969년 케임브리지 시에 있구요> <아니오, 저는 여기 제네바에 있어요. 기이한 것은 우리가 서로 닮았다는 거군요>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지. 내가 낯선 사람이면 알지 못할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해 보겠네”
“만일 내가 당신을 꿈꾸고 있다면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요”
“만일 이 아침과 이 만남이 꿈이라면 우리 둘은 서로가 꿈꾸고 있는 바로 그 대상이라고 생각해야 할 거야. 아마 우리는 이미 꿈을 꾸기를 멈췄는지도, 아직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우리의 명백한 의무는 마치 우리가 세계와 태어난 것과 눈을 보는 것과 숨을 쉬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꿈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야”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이기도 한 나의 과거”
“만일 누군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경우는 오직 개인들만이 존재할 뿐이지. <어제의 인간은 오늘의 인간이 아니다>고 어떤 그리스인이 선언했지. 제네바 도는 케임브리지의 한 벤치에 앉아 있는 우리 두 사람이 바로 그 증거지”
“나는 그에게, 그러니까 두 개의 시간과 두 개의 공간 속에 존재하고 잇는 똑같은 벤치에서 내일 다시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 만남은 진실이었고, 그러나 그는 꿈속에서 나와 얘기를 나누었던 것이고, 그래서 나를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리라. 나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그와 얘기를 나누었던 것이고, 그래서 여전히 그 만남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리라. 그는 나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명확하게 꿈꾸지 않았다. 나는 이제 이해가 되는데 그가 꿈꾸었던 것은 달러 지폐에 찍혀 있던 그 불가능한 날짜였던 것이다”
- <1983년 8월 25일>
“<우리는 둘이면서 하나로군. 그렇다해도 이게 꿈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꿈이란 말입니까?> <단언하건대 나의 마지막 꿈이지>”
“나는 금세 죽을 거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빠져들어 가게 될거고, 그리고 나는 계속 도 다른 나를 꿈꾸게 되겠지. 거울과 스티븐슨이 내게 안겨다 준 그 지리한 주제”
“<도대체 누가 누구를 꿈꾸고 있다고? 나는 내가 자네를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 그러나 자네가 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해> <꿈꾸는 자는 나예요>내가 도전적으로 반박을 했다. <자네는 꿈꾸는 사람이 한 사람이냐, 아니면 두 사람이 서로를 꿈꾸고 있느냐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가>”
“<우린 서로 속였어>그는 내게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처럼 느꼈기 때문이야.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둘이면서 하나잖아>”
“나의 운명이 자네의 운명이 될 것이고, 아주 짧은 순간 라틴어와 버질을 통해 계시를 받게 될 것이고, 두 시간과 두 공간을 오가며 나눈 이 기이한 예언적 대화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될거야. 자네가 다시 그것을 꿈꾸게 되었을 때는 자네는 내가 될 것이고, 자네는 나의 꿈이 될 걸세”
“그가 말을 멈추었고 나는 그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나 또한 그와 함께 죽은 것이었다.(...) 나는 방에서 도망쳐 나왔다. (...) 밖에서는 또 다른 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전체와 무> :
인식론적 관점으로 ‘절대’를 입증하려는 추론의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허구’의 창조로 귀결되는데, 절대적 의미의 추구 과정은 필연적으로 그 의미의 부정을 내포하게 되는 자기 모순을 드러낸다. ‘절대’를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절대’를 부정하게 한다. 즉 ‘어떤 것’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이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떤 것’ 이상의 것이요 ‘모든 것’일 수 있다는 논리적 비약이 성립된다.
한편 작가가 자신의 작품의 주인공에 자신을 투영하여 작품을 쓰는 것은 일반적이다. 그럼으로서 주인공들은 작가 자신이 되며,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다양한 인물들이 된다. 다시 말해 작가는 그가 창조한 모든 역할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작가가 어느 한 인물로 정확하게 규정될 수 없는 불특정한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아무도 아닌 것이다. (Yo soy todo, todo es nadie).
이렇듯 총체성과 무를 동일시한, 모순적인 의미 체계로 등장하는 <꿈>의 세계에서 주인공은 유일한 단독자가 아니다. 모든 인간이면서 동시에 아무도 아니다. 전부이면서 무이다. ‘나’라는 정체성이 박탈된 존재이다. 이렇듯 모두이면서 아무도 아닌 모순 논리 구조 세계인 <꿈>은 사물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나’의 정체성도 파괴시키는 공간이다.
“그의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의 얼굴과, 방대하고 환상적이고 자극적인 말들 뒤에도 단지 약간의 냉기, 그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꾸어지지 않은 꿈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마치 이집트의 프로테우스가 존재의 모든 겉모양을 완전히 없애버린 것과 비슷하게 그 누구도 그처럼 그 많은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이따금 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끔 자신의 작품 어느 곳에 은밀하게 자신의 비밀을 새겨놓았다. 리처드는 자신이 한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수많은 인물의 역할을 한다고 호언하고, 이아고는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기이한 말을 한다. 존재하고, 꿈꾸고, 행동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본성들은 그로 하여금 수많은 유명한 구절들을 떠올리게 만들어주었다”
"그에 관한 일화는 그가 죽기 직전 또는 직후에 하느님과 만났고, 하느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적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헛되이 그토록 많은 사람이었던 저는 이제 한 사람, 즉 나 자신이 되고 싶습니다> 회오리 바람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이 그에게 대답했다. <나의 셰익스피어여, 나 또한 나 자신이 아닌 걸. 나는 마치 네가 너의 작품을 꿈꾸었던 것처럼 세계를 꿈꾸었지. 그리고 내 꿈의 형상들 속에 마치 나처럼 수많은 존재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무도 아닌 네가 존재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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